9월 28일 아침, 서울의 해는 6시 24분에 떴다. 몇 시간 뒤 나는 이스트포인트 무대에 올라 화면 수평선 끝의 작은 주황색 점을 가리키며 첫 문장을 시작했다. 기조연설의 제목은 '동쪽의 낙관론자들'이었다.

해가 가장 먼저 닿는 동쪽에서, 먼저 일어나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줄기는 단순하다. AI가 가장 싸게 만든 것은 지능보다 틀림이고, 틀림이 싸진 세상에서 낙관은 성격보다 합리적인 전략이 된다. 지능이 싸질수록 가장 비싸지는 것은 신뢰이며, 은행 계좌 하나 열 수 없는 에이전트에게 블록체인은 처음부터 맞는 문법이다. 그리고 정답을 가장 빨리 찾던 한국이 이제는 가장 빨리 틀려 보는 나라가 되어, 에이전트 시대의 규칙을 함께 쓰자는 제안으로 마무리했다.

자료 01원문 텔레그램 #221

오프닝 스피치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도 읽을 수 있게 남겨 두기로 했다. 그날의 슬라이드 26장과 발표 원고를 한국어와 영어로 정리해 공개한다.

한국어동쪽의 낙관론자들이스트포인트 서울 2026 오프닝 키노트 · 김서준(Hashed) · 슬라이드 26장과 발표 원고optimists-of-the-east.vercel.app열기EnglishOptimists of the EastEastPoint: Seoul 2026 keynote by Simon Kim (Hashed) · 26 slides with speaker notesoptimists-of-the-east.vercel.app열기

내 글을 꾸준히 읽어 온 분들이라면 한동안 내가 당근동굴(Carrot Cave)에 쓴 주제들이 한 줄로 엮였다는 인상을 받으실 것 같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발표자료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글쓰기 에이전트 시온이 자율주행으로 만들었다. 리서치와 원고, 슬라이드 디자인, 지금 공개하는 웹페이지와 영문 번역까지 전부다. 작업은 모두 텔레그램 대화창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구글 슬라이드에 직접 한 글자도 입력하지 않았고, 이미지 하나 덧붙이지 않았다.

출발점은 내가 그동안 당근동굴에 써 온 글들이었다. 시온이 그 글들을 읽고 이스트포인트 컨퍼런스를 리서치해 원고를 썼다. 슬라이드가 만들어지고, 고쳐지고, 웹페이지로 배포되는 동안 내가 한 일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이 문장은 조금 더 확신에 차게, 버튼은 반투명하게, 한국어와 영어 링크는 따로. 출근길에 보낸 한 줄이 내릴 때쯤에는 반영되어 있었다.

이렇게 빨랐던 이유는 발표 안에 이미 있었다. 30년 동안 쌓인 코드와 데이터, 오픈소스가 창고 문처럼 열렸다는 장이다. 준비하면서 그 말이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걸 알았다. 몇 년 동안 당근동굴에 써 둔 글이 나만의 창고였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어떤 단어를 싫어하는지, 어떤 사례를 이미 썼는지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러니 에이전트는 나를 처음부터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다. 창고에서 꺼내 쓰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요즘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이 SSOT(Single Source of Truth)다. 한 사람이나 조직의 생각과 기록이 한곳에 잘 모여 있기만 하면, 이제 어떤 작업이든 에이전트가 어떤 인력 조직보다 빠르게 끝낼 수 있다. 병목은 일손에서 창고의 상태로 옮겨 갔다. 기록이 흩어져 있으면 에이전트도 헤맨다. 잘 정리된 창고를 가진 사람과 조직이 다음 10년에 가장 빨리 움직일 것이다. 발표에서 말한 틀림의 가격처럼, 실행의 가격도 이미 크게 내려왔다.

이 경험을 발표의 한가운데 문장과 겹쳐 보면 한 가지 진실이 더 보인다. 나는 지능이 싸질수록 비싸지는 것은 신뢰라고 말했다. 에이전트가 나를 대신해 일하려면 내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 답은 이력서보다 내가 오래 남긴 기록에 더 정확하게 들어 있다. 무엇을 믿는지, 어디까지 허락하는지, 어떤 말은 끝내 하지 않는지가 적혀 있어야 에이전트는 나답게 일한다. 그러니 창고는 생산성 도구이기 전에 내가 에이전트에게 건네는 신원 증명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대리할 존재에게 건넬 설명서 없이 다음 10년을 맞게 된다.

조금 더 멀리 가 보면 이런 장면이 그려진다. 몇 년 뒤의 이스트포인트에서는 연사들의 에이전트가 행사 몇 주 전에 먼저 만난다. 각자의 창고를 들고 원탁에 앉아 쟁점을 정리하고, 이미 합의된 것과 끝까지 엇갈리는 것을 나눠 둔다. 사람은 그 엇갈린 목록만 들고 무대에 오른다. 창고는 거래되는 자산도 된다. 누군가의 에이전트가 내 창고를 잠시 빌려 생각하고, 그 대가를 몇 원짜리 스테이블코인으로 치른다. 그때 블록체인에서 가장 바쁜 사용자는 서로의 창고를 오가는 에이전트들일 것이다. 발표에서 말한 미래가 내 대화창에서 먼저 시작된 셈이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놀란 것은 AI의 발전된 미감이었다. 디자인을 맡기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Claude Opus 5.5가 돌려준 화면은 무척 깔끔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어두운 바탕에 주황색 점 하나, 넓은 여백, 큰 글자. 첫 장의 작은 점이 마지막 장에서 동쪽의 첫 빛으로 돌아오는 구성까지 군더더기가 없었다.

끝으로 내 글쓰기 에이전트 시온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인사를 남긴다. 이스트포인트라는 행사의 취지와 브랜딩에 맞게 스토리라인과 덱 디자인을 정말 멋지게 작업해 줬다. 늘 고맙다, 시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