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발견한다.

나는 종종 두 종류의 글을 구분하려 애쓴다. 하나는 나를 위한 글, 다른 하나는 독자를 위한 글. 전자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각을 더듬거리며 붙잡아두려는 시도다. 후자는 이미 어느 정도 선명해진 생각을, 가능한 한 손상 없이 전달하려는 행위다.

이 구분은 매번 무너진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생각을 바꾸기 때문이다. 종이에 적히는 순간,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은 더 이상 그 생각이 아니다. 이미 다른 물질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를 위한 글"로 시작한 글이 어느 순간 "독자를 위한 글"로 변질되고, 독자를 위한 글이라 믿고 썼던 글이 나중에 읽어보니 나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글이 되어 있기도 하다.

토끼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이 현상을 점점 더 자주 경험한다.

초기에는 쓰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다. 생각이 선명해지는 느낌, 그것을 언어로 붙잡았을 때의 만족감.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쓴 글을 다시 읽는 일이 점점 불편해졌다. 최근에는 몇 달 전에 썼던 글을 열어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그 글을 썼을 때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내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그 글은 더 이상 나의 글이 아니게 된다. 과거의 내가 남겨둔, 이제는 낯선 누군가의 기록이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쓴다는 것은 곧 죽는 일이라고. 언어 속으로 자신을 새겨 넣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자신을 지운다고. 처음 그 문장을 봤을 때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것이 그저 사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였음을 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통과하면서 옆으로 밀려난다. 글을 다 쓴 사람은 거기서 한 발 더 떨어져, 자신이 더 이상 그 글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더 기이한 것은, 그 분리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본인이 그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중에야, 한참 뒤에야, 다시 그 글을 펼쳐 들고서야 깨닫는다.

모든 문장은 어떤 의미에서 흔적이다. 거기 적힌 '나'는 이미 그곳에 없다. 글은 늘 한 박자 늦게 도착하고, 도착한 순간 그 의미는 다음 독해로, 다음 맥락으로, 다음의 나로 미뤄진다. 그래서 글은 끝나지 않는다. 끝났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또 쓴다.

글을 쓰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생활의 리듬이 무너지면, 쓸 에너지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 그럼에도 왜 쓰는가.

아마도 쓰지 않으면 생각이 완료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은 머릿속에 있을 때 무한히 유연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밖으로 꺼내는 순간, 한정되고, 거칠어지고, 불완전해진다.

이 불완전함을 견디는 행위가 바로 글을 쓰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생각을 포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누군가에게 읽힐 수밖에 없는 상태로, 그 생각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 그리고 그 생각은 내보내진 순간부터 더 이상 내 통제 아래 있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는,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어제 쓴 글이 오늘 부끄러운 이유는 단순히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다. 그 글을 썼던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은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로부터 떼어내는 유일한 방법 중 하나다.

그리고 이 과정은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오늘의 내가 쓴 글은 내일의 나에게 또다시 부끄러운 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다.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날은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날일 것이다.

흔적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한, 나는 아직 어제의 나보다 조금 멀리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