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코드를 짠다. 예전 같으면 무모하다, 몇 달은 걸린다, 혼자서는 못 한다며 접었을 생각을 이제는 그냥 에이전트에게 적어준다. 돌려보고, 안 되면 버리고, 되면 붙인다. 머릿속에서 늘 먼저 말리던 검열관이 조용해졌다.
15년 만에 다시 개발을 시작했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용감해진 것은 아니다. 시작하는 데 용기가 덜 필요해졌을 뿐이다.
오래전에 포기했던 생각을 다시 꺼내보면, 안 될 이유 중 상당수가 이미 사라져 있다. 그때 나를 말리던 검열관이 틀렸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세계가 달라졌다. 나보다 먼저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이 변화가 낙관론자들의 시대를 열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지금일까. 만드는 일을 가로막던 세 가지 문턱이 마침내 함께 낮아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재료다. 인터넷에는 30년 넘게 코드와 문서, 데이터와 오픈소스가 쌓였다. 컴퓨팅 자원도 필요할 때 빌려 쓸 수 있게 됐다. 인류가 만들어놓은 것을 꺼내 쓸 거대한 창고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
둘째는 언어다. 기계를 다루기 위해 반드시 기계의 언어부터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원하는 것을 일상의 언어로 설명하면 된다. 사람이 기계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 쪽으로 왔다. 코딩할 줄 아는 사람보다 무엇이 불편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많다.
셋째는 시행착오다. 만드는 일은 결국 해보고, 틀리고, 고치는 반복이다. 예전에는 그때마다 전문적인 기술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몇 주에 걸쳐 몇 번 해보던 일을 하룻밤에 수십 번 반복한다.
문턱 몇 개가 낮아져도 마지막 하나가 남아 있으면 변화는 크지 않다. 그러다 마지막 문턱까지 낮아지는 순간, 어제까지 소비자였던 사람이 오늘은 만드는 사람이 된다. 세상이 갑자기 달라 보이는 것은 기술이 하루아침에 생겨서가 아니라, 따로 쌓이던 변화들이 함께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낙관과 비관이 틀렸을 때 치르는 비용이 달라진 것이다.
오랫동안 비관은 합리적이었다. ‘될 것 같다’며 시작했다가 틀리면 돈과 사람과 시간을 잃었다. 반대로 ‘안 될 것 같다’며 시작하지 않으면, 그 판단이 틀렸더라도 무엇을 놓쳤는지 알기 어려웠다.
잘못된 낙관에는 청구서가 왔고, 잘못된 비관에는 청구서가 오지 않았다. 비관은 오랫동안 무료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비관에 보상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개인은 머릿속에 검열관을 두었고, 조직은 승인 단계를 쌓았고, 국가는 규제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도 많이 시도하는 사람보다 틀리지 않는 사람을 높게 평가했다. 시도가 비싼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AI는 이 계산을 바꾸고 있다. 지금 가장 빠르게 내려가는 것은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아니라, 가능한지 확인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몇 달짜리 착각이 몇 시간짜리 실험이 된다. 오래 검토하는 것보다 일단 작게 만들어 확인하는 편이 더 싸다.
잘못된 낙관의 가격은 내려가고, 잘못된 비관의 가격은 올라간다. 내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동안 누군가는 열 번 틀리며 다음 시도에 필요한 단서를 얻는다. 한 사람은 기존의 판단을 지키고, 다른 사람은 새로운 정보를 쌓는다. 다음 판단을 내릴 때 둘이 아는 세계는 이미 다르다.
낙관론자는 더 많이 믿어서 앞서가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이 시도하고 틀려봤기 때문에 현실을 더 빨리 배운다. 낙관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표본의 크기다.
AI가 지능을 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AI는 틀림을 싸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의 순서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확신한 뒤에 만들었다. 이제는 생각한 것을 먼저 만들고, 결과를 확인한 뒤 판단한다. 판단이 실행의 앞에서 뒤로 이동한다.
가능한 것의 범위가 이렇게 빠르게 바뀌면 경험도 더 빨리 낡는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에는 늘 숨은 날짜가 있다. 2018년에 안 됐던 것과 어젯밤 최신 에이전트로 안 된 것은 전혀 다른 정보다. 세상이 경험보다 빠르게 변할수록 ‘무엇이 안 되는가’에 관한 경험부터 유효기간이 짧아진다.
그러니 안 된다는 말에는 날짜를 붙여야 한다.
한국을 생각하면 이 대목이 특히 마음에 걸린다. 개인의 시도 비용은 빠르게 내려가는데, 규제와 정치와 교육은 여전히 비관의 비용이 보이지 않던 시대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특히 허용된 것만 할 수 있다는 포지티브 규제는 이런 변화와 잘 맞지 않는다. 그 방식에는 국가가 미래에 가능한 일을 미리 열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제도보다 빨리 생겨나는 시대에 허용 목록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낡기 시작한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비관의 비용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제를 만든 이유는 문서에 남지만, 그 규제 때문에 태어나지 못한 기업은 기록에 남지 않는다. 무언가를 허용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가 생긴다. 반면 허용하지 않아 산업이 다른 나라로 옮겨가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잘못 허용한 것에는 책임을 묻지만, 잘못 금지한 것에는 거의 책임을 묻지 않는 구조다.
교육도 비슷하다. 학교 밖에서는 틀려보는 비용이 내려가는데, 학교 안에서는 틀린 답의 대가가 여전히 크다. 아이들은 정해진 문제를 얼마나 적게 틀리는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갈 세계에서는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여러 지능과 도구를 부리며, 결과를 의심하고 다시 시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한국은 지난 시대의 게임을 너무 잘했다. 이미 존재하는 답을 빠르게 배우고, 표준화하고, 오차를 줄이는 능력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그래서 오히려 바꾸기 어렵다. 실패한 시스템보다 버리기 어려운 것은 과거에 크게 성공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다음 게임에는 답지가 없다. 답이 있는 세계에서는 오차를 줄이는 사회가 강하지만, 답이 없는 세계에서는 탐색 범위를 넓히는 사회가 강하다. 앞으로는 성공률만큼이나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시도의 총량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시도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AI 때문에 오히려 무기력해졌다는 사람도 많이 만난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다른 사람은 하루 만에 앱을 만들고, 내가 오랫동안 익힌 기술은 순식간에 평범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면 뒤처졌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결과만 바라보다 보면 한 가지를 놓치기 쉽다. 그 결과를 만든 도구가 내게도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AI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키워줬다면 내 능력도 키워줄 수 있다. 잊어버린 지식을 채워주고, 배우지 못한 기술을 빌려주며, 오래전에 포기한 생각을 다시 시험하게 해준다. 나 역시 15년 동안 개발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그동안 놓친 것을 전부 다시 공부한 뒤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 무기력할수록 세상 전체를 따라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그 모든 변화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내 삶의 작은 불편 하나, 오래 미뤄둔 생각 하나면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만 움직여보면 된다. AI를 바라보고만 있으면 내가 작아지지만, AI로 무언가를 시작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커진다.
나는 이 시대가 좋다. 낙관적인 사람이 통계까지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아서다. 낙관론자는 흔히 조금 무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틀리면 순진하다는 말을 들었고, 맞아도 운이 좋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안 된다’는 판단의 유효기간이 짧아지는 세상에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다. 삶의 지혜이자 전략이 된다.
낙관은 시작하기 전에 갖춰야 할 확신이 아니다. 직접 해보고, 틀리면 고치고, 어제의 불가능을 오늘 다시 시험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확신이 있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면서 조금씩 확신하게 된다.
내 머릿속 검열관은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그가 안 된다고 말하면 한 가지를 되묻는다.
“그건 언제의 이야기인가.”
그래서 나는 지금을 낙관론자들의 시대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 믿어서가 아니다. 무엇이 가능한지 직접 확인하고, 그 범위를 스스로 넓혀갈 수 있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