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다가 아직 오지 않은 음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곡은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조금 앞서 가서 다음 음이 올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듣고 있던 곡은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 라르게토였다. 조성진은 이 협주곡을 오페라에 비유했다. 특히 아름다운 2악장의 중간 부분은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처럼 들린다고 했다. 회화가 공간의 예술이라면, 자신에게 음악은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했다.
https://youtu.be/sN1JnyCQvfw?si=gxnrauzmhk-pnqFx
그 말을 읽고 나니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 조금 선명해졌다. 다음 음이 아니라, 다음 음이 오기까지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클래식 음악을 오래 했다. 피아노 콩쿠르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바이올린으로는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습했다. 결국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에는 막막함도 있었던 것 같다. 음악 어딘가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진실이 있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거기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틀린 음을 고치는 일과 아름답게 연주하는 일은 달랐다. 기술적으로 틀린 곳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더 해야 아름다워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아름답다고 느끼는 연주가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 어려웠다.
한편 수학과 과학은 명료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도 어디서 막혔는지 찾을 수 있었고, 풀이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어린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나는 이과생이 되었다.
다시 쇼팽을 들으며 같은 자리에서 묻는다. 이 음은 왜 조금 늦어야 아름다울까.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것은 음악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마음을 붙드는 것은 그 박자를 조금씩 벗어나는 순간이다. 서두르고, 기다리고, 돌아오는 일. 어릴 때 막연히 엇박이라 느꼈던 것 중에는 선율의 시간을 앞당기거나 늦추는 루바토도 있었다. 아무렇게나 늦추면 서툰 연주가 되지만, 좋은 연주자는 듣는 사람이 기다림을 놓치지 않을 만큼만 시간을 늘였다가 다음 음을 건넨다.
음악학자 레너드 마이어는 음악이 만드는 기대와 그 기대의 지연에서 감정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소리를 예상한다. 이후의 연구들은 놀라움이 크다고 해서 무조건 즐거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을 확신할 때는 뜻밖의 화음이 좋을 수 있고, 길을 잃었을 때는 익숙한 화음이 반가울 수 있다.
아름다움에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질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읽는 순간에는 어릴 때 몰랐던 진실을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 든다. 다만 다시 음악을 듣는 순간, 여전히 설명 밖의 무언가가 마음을 울린다.
우리는 다음 음을 다 아는 곡을 수십 년 동안 다시 듣기도 한다. 놀랄 일이 없어졌는데 감정은 남는다. 익숙한 음을 듣는 동안 예전에 이 곡을 듣던 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도 요즘 AI로 곡을 만든다. 그러니 AI와 음악의 만남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입장은 아니다. 직접 쓰고 있으면서도, 조성진의 쇼팽을 들으면 쉽게 정리되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AI는 언젠가 왜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지 알게 될까.
훌륭한 연주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내는 것과, 그 망설임이 왜 아름다운지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일까. 통계로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이해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도 오래 듣고 흉내 내며 배운다. 어느 순간부터 흉내가 해석이 되는지, 정확히 선을 그을 수 있을까.
혹시 AI가 내가 끝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한다면.
음을 얼마나 늦추는것만이 아니라 앞선 시간을 어떻게 쌓아야 그 늦음이 마음에 닿는지까지 알아낸다면.
AI가 조성진보다 아름답게 쇼팽을 연주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무엇을 어려워했던 걸까. 음악적 아름다움 자체였을까. 아니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 자신이었을까.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소리 이상의 것을 듣고 있다고 믿어왔다. 저 망설임에는 망설여본 사람의 시간이 있다고. 저 슬픔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연주자가 실제로 무엇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건반 반대편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구체적인 사건을 설명하지 않고도 삶의 욕망과 고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생각에 마음이 간다. 어떤 음악은 아무 사연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내가 설명하지 못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상실을 겪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런 소리를 낸다면.
누군가의 내면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을 만났던 걸까. 상대가 나를 이해해서 위로받은 줄 알았는데, 이해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던 걸까.
다만 아름다운 연주를 만드는 원리를 알아내더라도, 한 사람이 그 연주에 이르기까지 보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구절을 거듭 연습하고, 어제 좋았던 소리가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손을 올리는 시간. 그 시간을 소리만 듣고 모두 알아낼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음악을 듣는다.
어릴 때 나는 아름다움을 어딘가에 있는 정답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충분히 뛰어난 사람은 거기에 도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멀리서 듣기만 하는 것처럼.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규칙이 있더라도, 한 음악가의 영혼이 조금 기다리기로 한 순간은 영원히 설레고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시간을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