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오 아모데이가 2025년 5월 Axios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Anthropic의 CEO이자 그 기술의 위험을 가장 크게 외치는 사람이다. "미국 화이트칼라 신입 일자리 절반이 5년 안에 사라진다. 좋게 포장하는 건 그만하자."
얀 르쿤이 2026년 4월 X에서 받아쳤다. 그는 Meta의 전 수석 AI 과학자이자 2018년 튜링상을 받은 딥러닝 3대 대부이다. "다리오는 틀렸다(일자리는 그렇게 많이 줄지 않을것이다). 그는 기술 혁명이 노동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하나도 모른다. AI 전문가 말고 경제학자 말을 들어라."
두 사람은 같은 모델을 본다. 같은 벤치마크. 같은 GPT, 같은 Claude, 같은 능력 곡선. 한 사람은 절벽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트랙터를 본다.
아모데이가 맞을까. 스탠퍼드 브린욜프슨 팀이 2025년 8월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탄광의 카나리아"다. 22~25세, AI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직군의 신입 고용이 2022년 말부터 13퍼센트 감소했다. 같은 직군 나이 든 근로자는 6~9퍼센트 증가했다. 연령 구간 하나를 빼고 나머지는 그대로다. 사다리는 그대로 서 있다. 오를 수가 없을 뿐이다. 사다리는 건물 밖에 세워져 있고, 건물은 사라지는 중이다.
서울의 한 신입사원을 보자. 스물여섯, SKY 졸업, 컨설팅 인턴 6개월, 정규직 계약서에 사인한 지 3개월. 그의 업무는 재무 모델 초안, 업계 리서치 요약, 슬라이드 초고. 모든 일은 Claude가 한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커피값도 안 들이고. 그는 운이 좋으면 해고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기수는 필요없다.
공채 면접장에 이런 질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이 리서치 혼자 했어요? Claude 썼어요?" 혼자 했다고 답하면 비효율이다. Claude 썼다고 답하면 대체 가능이다. 정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많은 이들이 쓴웃음을 짓는다.
인턴십 기회는 가끔 열린다. 과거 인턴이 하던 일을 AI가 하기에, 인턴은 AI가 못 하는 일들, 커피 심부름이나 감정노동을 떠돈다. 갈 곳 없는 20대는 대학원으로 쏟아진다. 학교는 아직 2010년대 교과과정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2030년의 취업시장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잘못된 지도를 들고 정확하게 걷는 사람들.
상위 10퍼센트는 AI를 부리고, 하위 50퍼센트는 AI가 아직 닿지 않는 몸 쓰는 일을 한다. 중간층은 진공이다. 한때 사무실이 있던 자리에 조용한 바람이 분다. 이것이 아모데이의 세계다.
그럼 르쿤이 옳을까. 트랙터가 출시되자 농부의 90퍼센트가 논에서 밀려났지만 그 자리에 도시가 솟았다. 사무직이라는 단어가 발명됐다. 한 세대가 논을 떠나고, 그 자식이 공장에 갔고, 손주가 사무실에 앉았다. 세 세대 90년의 완충. 그런데 지금은 한 세대 안에 세 번 바뀌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줄 지혜가 사라진다. 기술이 나이의 권위를 지운다.
2030년의 신입사원을 상상하자. 그의 직업명은 지금의 사전에 없다. AI 조율사, 합성 데이터 편집자, 에이전트 감독관. 그는 열 개의 에이전트를 동시에 부린다. 하루에 처리하는 업무량이 2020년 팀장 한 명 분이다. 그의 이력서에는 졸업장이 한 줄, GitHub 커밋 그래프가 두 페이지다.
새로운 일자리는 생길 것이다. 하지만 들어가는 길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대학이 티켓이었다. 새 세계에선 AI와 함께 굴러본 시간이 열쇠다. 집에서 GPU 돌려보고 부모가 API 크레딧 사준 이들이 앞서간다. 공교육의 평등주의가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새 직업에서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계급은 사라지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다. 중간이 사라진다는 점은 아모데이의 세계와 같다. 달라지는 건 계급의 단위다. 돈이 아닌 시간으로. AI를 부리는 자는 하루는 48시간,
혹은 그 이상이다. AI가 시키는 일을 하는 자는 24시간. AI가 닿지 않는 몸 쓰는 일을 하는 자는 교대 감옥 속의 12시간. 하루의 밀도가 계급을 나눈다. 가난은 돈의 문제에서 시간의 문제로 이동한다.
두 사람의 예측은 반대처럼 보이지만 도달하는 풍경은 닮았다. 2026년 3월 미국 실업률은 4.3퍼센트다. 아모데이의 예상인 10~20퍼센트까지는 아직 멀다. 르쿤의 낙관도 전혀 증명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일자리가 얼마나 남아있느냐가 아니다. 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뀌는 속도가 사람이 적응하는 속도보다 빠를 때, 사람은 무엇을 붙잡고 자기를 정의할까.
직업이 정체성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저는 기자입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그 문장 하나로 각자를 설명했다. 이제 AI가 변호사의 서면을 쓴다. 기자의 기사를 쓴다. 의사의 진단을 내린다. 나는 AI가 못 하는 나머지의 변호사인가. AI를 쓰는 변호사인가. 변호사였던 사람인가.
사람이 무너지는 건 능력이 사라질 때가 아니라 의미가 사라질 때다. AI가 못 하는 나를 찾는 순간, 나는 AI의 능력 곡선에 내 정체성을 묶는다. 새 프론티어 모델이 나올 때마다 나는 작아진다. 트랙터 때는 나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라고 확정할 수 있었다. 이번엔 그 진단조차 어렵다.
3월의 나는 6월의 나를 상상할 수 없다. 정체성의 반감기는 점점 짧아진다. 피카소가 한 화풍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 수십 년을 썼다면, 지금은 분기마다 나를 버려야 한다.
인간은 본래 망각의 동물이다. 어제의 서툰 나를 잊고 오늘의 나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에게 망각은 결함이 아니라 자유였다. AI는 잊지 않는다. 내가 작년에 쓴 프롬프트, 2년 전 삭제한 줄 알았던 초안. 어디선가 로그로 남아 있다. 반감기는 짧아지는데 유통기한은 영원해진다. 망각할 권리를 가진 마지막 세대는 지금 늙어가고 있다.
그래서 반감기가 짧아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정체성에 더 집착한다. SNS 자기소개 문장은 점점 길어진다. MBTI, 음악 취향, 성향 테스트 결과. 빠르게 증발하는 자기를 붙잡아두려는 접착제다.
시간축이 크게 흔들릴 것이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의 의미를 미래 세대는 알까. 하루의 리듬, 일주일의 리듬, 일 년의 리듬. 일이 빠지면 시간이 형태 없이 돌아온다. 자유를 넘어선 무중력. 우주정거장 체류 6개월이면 뼈의 1~2퍼센트가 녹는다. 중력 없는 시간 속에서는 자아의 뼈도 녹는다.
한국에서 떠오를 문제는 더욱 아프다. 시험으로 사람을 분류해온 나라다. 수능, 공무원 시험, 고시, 공채. 피크 시절엔 매년 30만 명이 공시에 매달렸다. 한국의 시험은 얼마나 잘 암기하는 사람인가를 정의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았다.
AI는 그 시험을 순식간에 만점으로 푼다. 고장 난 분류 기계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 들어가고 정년까지 버티는 것. 부모 세대의 각본은 그대로인데 무대가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명함 없이 자기를 소개하지 못한다. 은퇴한 아버지들이 빨리 늙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함이 사라지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람도 같이 접힌다. 은퇴 아버지의 5년은 이제 신입사원의 5년이 된다. 명함이 있을 때 우리는 자기를 외부에 위탁해서 살았고, 직함이 대신 말해주었다. 이제 그 말을 내 입으로 해야 한다. 평생 남의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자기 이름은 낯선 외국어다. 발음해보려는 순간 입이 멈춘다. 그 침묵이 이 시대의 가장 조용한 비명이다.
아모데이의 시나리오든 르쿤의 시나리오든, 우리에게 같은 것을 묻는다. 일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직업이 자기소개의 첫 문장이 된 건 산업혁명 이후 기껏 수백년이다. 인류사 1퍼센트의 짧은 예외였다. 농경 사회의 인간은 직업이 아니라 땅과 가족으로 자기를 설명했다. 저는 광산 김씨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질문이 돌아오고 있다.
직업 이외의 무언가로 어떻게 나를 설명할까.
그 무언가의 정체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AI가 못 하는 일을 찾는 게임이 아니라, AI가 있어도 상관없는 자신을 찾기. 능력 곡선의 바깥이 아니라, 능력 곡선의 축 자체가 다른 곳.
각자가 찾아야 한다. 학교가 가르쳐줄 수 없다. 기존 포맷의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다. 모두 시대가 던진 질문을 고민해야한다.
지금도 스물여섯 살의 누군가는 이력서를 쓴다. 그 이력서를 읽을 게 사람일지 AI일지도 모른 채로.



